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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코프에서 가봐야 하는 투어는 솔트마인투어, 그리고 아우슈비츠 투어이다.

아우슈비츠는 크로코프에서 2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가면 갈수 있는데,

 

사실 나는 아우슈비츠 투어를 가기전에 좀 망설였었다.

뭐랄까,, 어둡고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반성의 현장을 보고싶지 않다는,

즐겁고 행복하고 기쁜 상큼한 것들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그렇지만, 지성인으로서 과거의 역사는 직시하고 싶지 않더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투어를 가게 되었다.

 

 

역시나 여기도 송수신기를 통해 아우슈비츠 투어 가이드가 따로 나와 설명을 해준다.

단체로 묶어서 투어를 하게 되는데, 여러 그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니므로 가이드를 잃어버리지 않는것이 중요하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은 너희들을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 문을 통과하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시작되는데,

사실 아우슈비츠는 수용소이기 이전에 원래 있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내가 아우슈비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를 통해 접한것이 었는데

그 이미지는 사실은 아우슈비츠보다는 버커나우에 가까웠던것 같다.

나중에 버커나우도 가게 되는데 버커나우는 제2의 아우슈비츠로,

아우슈비츠는 원래 있던 것을 활용한것이라고 하면, 버커나우는 아우슈비츠가 공간이 부족하게 되니 속성으로 지어낸 수용소이다.

훨씬 시설도 열악하고 정말 삭막한...

 

 

각 동마다 사람들을 수용해놓고 노동을 시키는데,

사실은 노동을 하게된 사람은 전체중의 10프로정도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보내져 죽었다고 한다.

노동을 할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의사가 외양만을 보고 잠시잠깐의 손동작으로 좌우로 사람을 나누어 보내고

좌가 노동하는 사람이라면 우는 바로 가스실로 보내지는 사람이라고.

어린아이, 여자, 장애인, 노인은 바로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했다.

 

위에 있는 통들이 가스실에서 사용되었던 가스성분이 담겨있던 것인데

저 한통으로 수백명을 살상할수 있었다고 하니, 저렇게 보관된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찍지는 못했지만,

수용소에 온 사람들의 소지품들. 

안경, 구두, 칫솔, 캐리어, 옷가지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모든게 수북히 쌓여 전시되어 있었다.

왜냐.. 나치군이 수용자들에게 빼앗아 전쟁물품으로 사용했다고.

심지어 가스실의 시체의 이를 떄운 금까지 빼내 활용했다고 한다.

막판에 나치군이 철수하면서 불태우려 했으나 차마 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서 참혹한 실상을 알려주었다고.

 

 

 

저 나무판떄기가 바로 사람들이 잠잤던 곳인데, 4-5명이 한칸에 머물러야 했다고 한다.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이름이 남겨진 사람들의 사진과 입소연월일과 사망한 연원일이 적힌 액자들이 하나하나 걸려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입소이후 2개월이상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 극심한 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가이드가 해준 말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이 했던 말이었는데,

"내가 아우슈비츠에서 꺠달은 진정한 굶주림, 배고픔이란

 바로 내 옆에 있는 동료가 음식으로 보일때,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저 벽에서 많은 사람들이 총살되었다고 했다.

 

그리고서 우리는 제2의 아우슈비츠라고 하는 버커나우로 이동했다.

 

 

 

 

벽돌로 지을 시간도 없이 나무로 지어진 대규모 수용소

아우슈비츠가 10이라고 하면 버커나우는 50정도의 규모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시설 또한 훨씬 열악했다.

 

위에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용변기였다.

인간의 존엄이라고는 찾아볼수 없게 수용자들은 구멍위에 앉아 마치 가축처럼 생활해야만 했다.

 

음..

사람의 본성이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목격한 것은 진실로 충격적이었다.

버커나우에서 나오는 길에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깃발을 들고 단체로 버커나우에 견학을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참혹한 현장을 보고 그 후세들에게 교육할것이고,

또 나처럼 그 광경을 목도하는 사람들은 또 한번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겠지만.

 

사실은 부러웠다.

역사 속에 수많은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들이 많지만,

물론 나치즘과 동일하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동일한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우리와 일본사이에는 그렇게 보고 비판할 객관적 증거자료와 반성의 참회의 장소가 없다는 것이

눈물이 핑 돌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추신) 마음속의 일렁임을 잠재우고자 벤치에 잠시 앉아있던 내게

        여자 2명이 다가왔다. 보고나서 어떤 느낌이 드냐며. 나는 솔직히 나의 감정을 얘기했는데.

        자기들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며. 자기들은 종교상에 문제로 군대에 가는 것을 거부할수밖에 없는데 범죄로 규정되어 처벌을 받는다며.

        한국도 그러하다며. 어떻게 생각하냐고.

        띵했다. 아. 폴란드에도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니. 그렇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악.

        실제로 우리나라는 전쟁의 위험앞에 있으며, 실제로 방어력이 있지 않다면 북한이 어떤짓을 할지 차후에 이보다 심한일이 일어날수도 있다며.

        복잡한 문제들이 있으니, 이런 얘기를 당신들과 하기엔 무리가 있다며 할말없다고 난 가겠다고.

        아. 뭔가 모를 아련한 기억이 밀려왔다. 무엇이 옳은가 치열하게 논의하고 생각하고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던 대학 1-2학년 열정의 시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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